
아주 먼 과거와 미래의 조합은 그 모두를 지금의 우리가 겪어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자체로 흥미를 불러온다. 소설의 모티프를 <찬기파랑가>의 기파랑의 이야기에서 가져왔다고 하는 박해울 작가의 첫 SF소설 <기파>는 그 시작점부터 충분히 흥미롭다.
얼마전 읽었던 김초엽 작가의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SF의 형식을 빌어 지금 해야 할 이야기들을 잘 녹여냈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즐거운 작품이었다면, <기파>는 SF장르가 갖고 있는 특징을 정석대로 따르고 있다. 다시 말해 전자는 문학적 성취가 돋보이는 대신 장르적인 재미는 조금 떨어질 수도 있는 반면, 후자는 새로운 시도나 문학적 성취보다는 장르적인 특징을 더 잘 살리고 있어 일장일단이 대비된다.
'눈 앞에' 펼쳐지는 IF의 세계
SF장르는 기본적으로 if를 깔고 이야기를 시작하기 때문에 지금을 초월하는, 혹은 더 근원적인 주제들이 많이 다뤄진다. 미래를 가볍고 경쾌하게 다룬 작품들에 대해 '스페이스 오페라'라고 따로 명칭이 붙을 만큼 많은 작품들이 무게감 있는 진행을 보여준다. 이 주제의 무게를 잘 받아주기 위해서는 그 기반이 되는 if를 단단하게 잘 잡아줘야 한다. 동시대 문학에서는 버스정류장이라는 한 단어로 설명하면 충분할 내용도, SF에서의 버스정류장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어떤 풍경이 보이는지, 어떤 행동을 해야 하는지, 나아가 이동수단의 개념까지도 자세하게 풀어야만 전달이 가능하다. 그런 특성때문에 SF 소설은 대단히 시각적이다.
<기파>는 이런 장르적인 특징이 착실하게 잘 담긴 작품이다. 우주를 유영하는 크고 하얀 고래와 같은 우주선. 기계와 결합되어 매끈하지 않은 외모의, 스팀펑크풍의 인간상. 공간을 휘저으며 다니는 은빛 나노머신의 파도. 검은 우주 하얀 공간 속 녹색의 거대한 식물원.
개인적으로 SF를 좋아하기 때문에 레퍼런스가 많아서 그럴수도 있지만, 이미 기존에 있었던 어떤 이미지들을 연상시키기는 해도 그것들이 똑같은 요소의 재반복이 아니라 이야기를 위해 잘 쓰이고 있다는 점이 좋다.
기본적으로 추리물의 형식을 띄고 있어서 이야기를 영화보듯 편하게 따라 갈 수 있고, 중간 중간 교차되어 나오는 다른 시간대의 이야기 등, 형식적인 면에서도 어색함 없이 탄탄하다. 많지는 않지만 복선, 소위 말하는 떡밥의 회수도 확실하게 마무리 짓는다.
착실하게 기본기를 잘 갖추고 있다고는 했지만 SF 장르에서 특히 시각적인 전달력은 매우 중요하다. 2016년 개봉한 영화 <패신저스>는 각본 자체는 형편없었음에도 장면 장면들이 인상적인 것들이 많아서 아직까지 기억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있을 정도이다. <기파>는 비록 글이지만 충분히 상상 가능한 이미지들을 제공하고, 또 그 이상으로 이야기의 구성까지 잘 갖춰져 있어서 전체적인 완성도가 높다. 뿐만 아니라 주제를 드러내고 다루는 방식에 있어서도 부족함이 없어서 생각할 거리도 제공하고 있다.
다만 아쉬운 것은 캐릭터가 다소 평면적이라는 것이다. 작품의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데에 소수의 인물들의 심리상태에 의존하는 만큼 인물들의 캐릭터가 무척이나 중요한데, 이미지를 전하는데에는 성공했어도 입체적으로 느껴지지는 않다보니 주인공들의 행동에 200% 공감을 하거나 몰입을 하기가 쉽지는 않았다.
워낙 국내에서는 SF 소설은 마이너 장르인데다가 글로 쓰인 만화 이상의 작품들이 드문 와중에 박해울 작가의 등장은 김초엽 작가와 더불어 무척이나 반갑다. 아주 무겁고 정교한 SF 소설이라거나 문학적인 성취를 이룬 작품이라고는 말하기 어렵겠지만, 영화 보듯 부담 없이 정말 잘 읽히는 작품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접하고 관심을 가졌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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