균형 이상의 반짝임<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_ 김초엽> by InDee



국,영,수 잘하면 그냥 범생인가보다 하지만, 국어를 잘하는데 과학도 뛰어나고, 거기에 미술까지 잘한다면 그 때 부터는 범상치 않은 이질적인 존재처럼 보이기 시작한다. 
내게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딱 그런 책이었다. 문학 코너에 흔히 있을법한, 예쁘장한 신간인줄 알았는데 '신인 여성 작가', 'SF', '소수자' 등의 수식어가 붙어있어서 항상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반신반의하며 읽기 시작했지만 지금은 나처럼 주저하는 사람들에게 강하게 추천하고 싶은 책이 되었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까다로운 재료들을 갖고 굉장히 균형잡힌 요리를 만들어 냈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균형감과 더불어 다양한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는 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장점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SF, 드라마, 메세지 세 개의 축으로 단단하게 서있다. 




-SF

SF는 말 그대로 공상과학이기는 하지만, 그렇기에 더욱 정교해야 설득력을 갖는다. 단순히 현실에서의 소재를 취재 및 재구성해서 만들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라, 하나의 '세계'를 새로 만들어야 하다보니 서사의 길이나 깊이와는 무관하게 설정 그 자체로 충분히 무게감이 있어야 한다. 마술과 마찬가지로, 몰라서 속는 것이 아니라 알면서도 설득당하는 분야인 것이다. 

몇 년 전 영화 '컨택트(Arrival)'로 화재가 되었던 SF 소설가 테드 창의 경우 SF 장르의 정교함을 최대한으로 끌어올려 세계적으로 매니아층을 형성하고 있다. 잘 만들어진 SF는 청자로 하여금 이야기 속의 특정 시점, 특정 인물에만 집중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 세계 자체를 상상하게 만든다. 반지의 제왕이나 해리포터도 정교한 세계관을 구축했지만, SF소설의 가상세계는 일종의 가설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실제감이 더해진다는 것이 판타지와의 결정적인 차이점이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역시 위의 지점에서 무척 잘 만들어진 소설이다. 각각의 단편들이 분량이 많지 않음에도 간결하고 단단하게 저마다의 세계관을 잘 구축해놓았다. 마술에 핵심 트릭이 있듯이 SF에도 이야기의 씨앗이 되는 하나의 상상력이 존재하는데, 그것을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게 풀어서 전해주는 섬세함이 인상깊었다.
  


"인간을 비 인간동물과 구분하는 명백한 특질들이 사실은 인간 밖에서 온 것들이라면."
-P129, 공생가설



"대체 왜 어떤 사람들은 '우울'이나 '분노', '공포' 따위를 사려고 하는거지?"
-P200, 감정의 물성





-드라마

지금이야 워낙 SF 장르 속에 드라마를 잘 담아 성공한 영화들이 많아서 특별하지 않아 보일수도 있지만, 사실 거의 대부분의 SF 소설들은 정교한 세계관 구축에만 너무 공을 들여서 드라마의 완성도가 떨어지거나, 반대로 드라마적인 요소를 강조하려 세계관을 스스로 파괴하여 균형감을 잃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구병모 작가의 경우도, 이야기가 담고 있는 메세지와 드라마의 깊이가 있을지언정 설정에 있어서는 아주 정교하지는 않다는 느낌을 항상 받는 반면, 김초엽 작가의 소설에서는 단단한 세계 위에서 인물들의 드라마가 흐르고 있어 의식적으로 이해하려 하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읽힌다. 

이게 별 것 아닌것 같아 보여도 아인, 외계인, 웜홀, 가상인격, 우주비행사 등이 나오는 이야기를 거부감 없이 읽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대단한 장점이다. 어쨌든 문학은 읽고 나서 설정이 아닌 이야기가 남아야 한다. 



"우리는 행복하지만, 이 행복의 근원을 모른다는 것." 
-P19,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잘 자.
처음으로 잘 자라는 인사를 하고 깔개 위에 몸을 뉘었을때 희진은 문득 울고 싶었다. 고작 그 정도의 말을 건네는 것만으로도 누군가를 더 소중하게 여기게 된다는 사실을 예전에는 몰랐다."

-P82, 스펙트럼



"우리는 점점 더 우주에 존재하는 외로움의 총합을 늘려갈 뿐인 게 아닌가."
-P182,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메세지 

모든 이야기들이 그렇듯, 설정과 드라마가 뛰어나도 결정적인 차이를 주는 것은 이야기가 담고 있는 메세지이다. 좋은 설정에 자연스러운 드라마를 풀어냈다고 해도, 담고 있는 메세지가 읽히지 않는다면 단순히 재미만 있는 이야기에 그쳤을 것이다. 

매체 불문하고 요 근래에 나오는 모든 이야기들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불만이었던 것이 메세지를 강조하기 위해 다른 모든 요소들을 희생시킨다는 것이었다. 마치 맥락 모두 생략하고 쪽집개 주입식 강의같은 느낌을 주는 작품들을 너무나도 많이 봐와서 피로감이 높던 차라, 오히려 소수자에 대한 이야기를 보여준다는 이 소설의 해설이 책을 고르는 것을 망설이게 됐던 가장 큰 원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이 그런 선입견을 완전히 탈피한 작품이라 반가웠다. 메세지를 위해 희생되는 요소 없이 세계관, 드라마가 잘 맞물려 돌아가는 중에 메세지 역시 자연스럽게 부각된다. 흔히 말하는 이야기와 맥락이 갖는 힘을 활용해서 해야 할 말을 제대로 하고 있다. 



"그녀를 규정할 장소와 이름이 집이라는 울타리 밖에 하나라도 있었다면, 그녀를 붙잡아줄 단 하나의 끈이라도 세상과 연결되어 있었더라면."
-P264, 관내분실



"솔직히 목숨을 걸고 올 만큼 대단한 광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가윤은 이 우주에 와야만 했다. 이 우주를 보고 싶었다."

-P319,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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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개의 이야기 모두가 똑같은 무게로 마음이 갔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내게는 무엇 하나 흠잡을것 없이 매력적인 이야기들이었다. 개인적으로 SF를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도 그 상상력 안에 담은 온기있는 이야기들이 마음을 끌었다. 
딱 한 가지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을 꼽으라면, 이 책의 뒤에 수록된 해설이었다. 여러 관점에서 볼 수록 매력이 있는 작품들을 너무 한 가지 방향에서만 조망하고 있어서 오히려 작품을 보는 시야를 제한한다고 느꼈다. 

SF소설로서도, 문학으로서도, 또 소수자에 대한 서사로서도 추천할만한 책이다. 단편도 충분히 즐겁지만 장편으로도 만나보고 싶은 이야기들이다. 
범상치 않은 소설을 뒤늦게야 접하게 되어 무척이나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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