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 Them _ 조이스 캐롤 오츠]
처음 영어를 공부하기 시작했을때 가장 먼저 배우는 것은(적어도 한국에서는) 인칭 대명사이다. 나, 너, 우리, 그들. 이것들 없이는 말을 하기가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어쩔 도리 없이 걔중 하나를 선택하는 순간, 좋든 싫든 너와 나 사이에, 혹은 우리와 그들 사이에 보이지 않은 선이 그어진다. 그래서 조이스 캐롤 오츠의 소설 제목 [그들 , Them] 은 다분히 의미심장하다.
이 소설에는 하나의 가족이 등장한다. 가족의 일대기라고 해도 좋을 만큼 거의 한 세대를 아우른다. ‘그들’은 이 가족을 지칭한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짐작해볼수있다. 소설이 배경이 되는 미국에 대해 나는 두 가지 이미지를 갖고 있다. 하나는 뉴요커나 월가가 연상되는 화려한 대국이고, 다른 하나는 슬럼이나 인디언의 땅이 연상되는 텁텁한 대륙이다. 소설의 중심인 로레타의 가족은 명백하게 후자의 세계에 살아가고 있다.

이 소설을 읽기 시작했을때 나를 당황케 했던 것은 7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사건의 전개가 무척 빠르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이고 어떻게 끝이 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 그저 덤덤히 그들의 삶을 빠르게 훑는 시선에 적응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역사를 마주하고 있는듯 했다. 백번 다시 생각해도 그다지 특별할것 없어 보이는 이 소설의 탁월함은 가장 마지막 장을 넘기기 전까진 알 수가 없다. 소설이라고 하면 작품이 묘사하고 있는 서사에 주의집중을 하기 마련인데, '그들' 은 서사의 인과를 풀어주는 데에 무척 불친절해서 내가 갖고 있던 모종의 기대감을 모두 허물어 버리는 듯 했다. 그러나 이 서사와 독자 사이의 거리감이야 말로 이 작품의 가장 중요한 소재이며 주제이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하자면. 소설이나 영화나 그 어떤 다른 매체든, 두 가지 형태의 감동이 있을 수 있다. 그 매체의 컨텐츠 자체가 갖는 탁월함이 주는 감동. 또, 그 매체 자체의 특성을 잘 활용하는데서 오는 감동.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매체 소비자들은 일반적으로 전자의 감동을 기대하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고 일반적인 기대를 벗어나는 작품들에겐 '실험적'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다시 돌아와서, 위의 기준으로 생각했을때, [그들]은 다분히 후자에 가까운 소설이다. 그들의 삶을 들여다 보면서 그들이 삶에 대해 갖는 막막함과 두려움에 참 여러번을 공감했지만, 어쨌건간에 이건 나의 이야기가 아닌 그들의 이야기일 뿐일터였다.
p716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영혼 속으로 빠져드는 것은 검열이 아니라 공감이다. <<그들>>은 실제로 사랑의 소산이며, 사랑하는 사람들이 모두 그렇듯이 나 또한 나 자신을 판관으로 세울 생각이 없다. 소설의 의미는 독자의 수 만큼이나 많아질 수 있다.
작가는 책을 마무리하며 이런 말을 했지만, 독자들은 이 이야기를 따라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이미 작가가 의도적으로 마련한 영악한 덫에 걸릴 수 밖에 없다. 내가 그들에게 얼마만큼 공감을 하든, '그들'이라는 프레임 바깥쪽에서 멤돌게 하는 것. 시종일관 방관자의 태도로, 독자 당신과 나의 '우리'로 머물러 있던 작가는 마지막에 가서 불현듯 돌아서더니 서슬 퍼런 칼날을 독자에게 들이댄다.
p706 하지만 모린, 너도 '그 사람들'중 하나가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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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를 보고 누군가는 오해를 할 수도 있겠다. 이 소설을 두고 실험적인 성격을 갖는다고 말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소설이라는 장치를 활용 할 줄 아는 작가의 영리함을 이야기 하고자 함이었다. 당연히 [그들]은 쓸데없이 종이를 낭비해서 길게 쓴 소설이 아닌, 그 이야기 자체로도 주효한 가치를 가진다. 다만 내게는 그 이야기 자체보다는 작가의 화법이 더 인상적으로 다가왔을 뿐이다. 애초에 앞서 이야기 했던 모든 것들은 5~60년대의 그들의 삶에 푹 잠겼다가 벗어나야만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흠뻑 젖은 채로 바람을 맞듯, 뒷 맛이 무척 서늘하다. 탁월하고 영리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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