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 소설가 박완서 대담집 by InDee

[우리가 참 아끼던 사람 - 소설가 박완서 대담집]
호원숙 엮음


 스타 쉐프가 냉장고와 함께 등장하고, 온갖 종류의 전문가들이 스크린 속에서 열띤 토론을 하는 동안에도 소설가는 여전히 그 신비로움을 잃지 않은 몇 안되는 직업 중 하나다. 도대체 소설가라는 사람들은 어딜 가야 만나 볼 수 있을지 감이 오질 않는, 이 세상에 살짝 걸쳐있는 듯한 종족처럼 느껴진다. 온화하지만 날카롭고, 세상과는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으면서 항상 어떤 고민을 짊어지고 살아야만 할것 같은 것이 내가 평소 생각하던 소설가의 이미지였다. 이는 내게 있어 어느정도는 동경의 대상이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느낌을 동시에 가져다 준다.
 부끄럽게 고백컨대 나는 고 박완서 작가의 글은 한 번도 접해보질 못했다. 신선한 구성, 유려한 문장, 짜임새 있는 이야기 등에 환호하던 나로서는 박완서 뿐만 아니라 내 이전 세대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은 섣불리 손이 가지 않았다. 수 없이 쏟아져 나오는 쿨해보이는 책들 속에서, 구태여 수 없이 반복된 우리내 오랜 이야기를 외면해왔다. 인생의 짐이 말뚝처럼 짓눌러서 깊은 어딘가에 은둔하고 있을것만 같은 내 이전 세대의, 우리나라 작가들의 정서는 나와 어딘가 맞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내 멋대로 무지하고 폭력적으로 범주화 시켜버린 틀로 부터. 박완서는 너무나도 쉽게 깨고 나와 돌연 내 앞에 우뚝 선다. 

p19 우리나라 국민성과 나는 아무래도 안 맞는 것 같아요

 전후 맥락없이 뚝 잘라놓은 문장이지만, 이 문장을 시작으로 박완서는 내가 정형화 해놓은 기성세대 작가들의 전형과 들어맞는 구석이 사실은 하나도 없었다. 그녀는 어딘가에 은둔하고 있다기 보다도 양지바른 조용한 동네에 햇살과 함께 놓여있는 사람같았다. 
[우리가 아끼던 사람]
 형식상으로는 대담집이지만, 11 명의 시선으로 저마다 다른 시간에 다른 방식으로 바라본 '우리가 아끼던 사람'에 대한 책이다. 부득이하게도 박완서 본인의 글을 접하기에 앞서 다른 방식으로 그녀를 알게 되었지만, 오히려 소설에서 드러나는 그녀의 모습보다 이 대담집에서 더욱 그녀가 생생하게 잡히는 것 같다고 감히 생각을 해본다. 이 책을 통해 바라본 그녀는 여러모로 퍽이나 두드러지는 면모들을 갖고 있다. 인생의 변곡점이 꺾이고 나서야 등단해서 그 누구보다도 왕성하게, 그리고 훌륭하게 작품 활동을 해왔고, 소위 말하는 여류 작가로서의 사회적 한계도 진작에 벗어 던진듯 했다. 책중에 김승희 작가가 기술한 것 처럼 버지니아 울프에게 소개를 시켜줘야 할, 시쳇말로 신여성이었다. 저마다 다른 시선으로 조각 조각 이어붙인 상상속의 그녀의 모습은 활짝 웃고 있는 얼굴이었다. 비록 그녀를 만나보지 못했더라도, 책 표지의 사진을 보지 않았어도 책의 마지막 장에 가서는 반드시 그녀의 웃음을 선명하게 떠올릴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한날 한시에 진행된 대담이 아닌 만큼, 반복되는 인터뷰 속에 몇 가지 화두가 잡힌다. 하나는 인간 박완서의 모습이고, 둘은 일사일언으로 축약되는 그녀의 소설관, 셋은 문학의 역할이다.
인간 박완서는 앞서 이야기 했듯이 정형화 된 틀에 갇히지 않고 햇살같은 웃음을 떠올리게 하는 사람이다. 

p93 어쩐지 방학 맞아 시골집 내려온 여고생 같다는 생각을 했더랬다. ‘아유 그게 말이지요’라든가, ‘뭐, 그냥’이라고 시작하는 것은 선생의 독특한 화법이다. 그러다가 웃음으로 이어지는 그 목소리는 여전했다. _ 김연수

 그리고 또한 현명한 어른이기도 하다. 뒤늦게 작가 생활을 시작한 그녀는(전혀 늦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그래도 일흔, 여든은 내가 젊었을 때 내 인생 계획에 없었던 나이예요." 라고 이야길 하면서도 삶을 부지런히 아끼고 다듬을 줄 아는 사람이었다.

p126 칠십대의 시간이 마음에 드십니까?
뜻하지 않은 나이죠. 예정에 없었던. (웃음) 걱정도 없고 먼 계획도 없고 하루하루 편안히 가요. 예전에는 작가로서 계약도 하고 연재도 했지만 이제는 매이는 일은 안 하게 되더라고요. 어찌 보면 여벌의 삶이지만 내가 원했던 삶이 이것이 아니었나 싶어요. 경제적, 육체적, 감정적으로 내가 온전히 독립했다는 자유의 느낌이 굉장히 좋습니다.

p165 노년의 내면이 깊이 있게 드러나는 대목은 말할 것도 없고 선생의 소설에서 특히 소중한 부분 중의 하나는 노년의 시선으로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대목이다. (…)
온 세상이 저애들 놀아나라고 깔아놓은 멍석인데 나는 어디로 가야 하나. 그래, 실컷 젊음을 낭비하려무나. 넘칠 때 낭비하는 건 죄가 아니라 미덕이다. 낭비하지 못하고 아껴둔다고 그게 영원히 네 소유가 되는 건 아니란다. 나는 젊은이들한테 삐치려는 마음을 겨우 이렇게 다독거렸다.
젊은이의 시선에 비친 노인을 재현하는 작품은 많지만 그 반대는 드물다. 재현의 권력은 젊은이들에게 있으니까. 그런 환경에 익숙해져서일까. 가끔 우리 젊은이들은 노인들에게는 마치 내면이라는 것이 없다는 듯 행동할 때가 있다. 그런데 선생의 소설에는 통쾌한 시선의 역전이 있다.

그녀가 했던 말들은 나이듦에 대해 생각해 봄과 동시에 삶의 지침 혹은 목표가 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책에는 박완서 작가의 맑은 모습들로 가득하다. 

p69 작가는 자기가 가진 상처가 아물기를 두려워하며 아무는 딱지를 떼어내가며 그 흐르는 피로 소설을 써 그 상처를 드러내야 한다

p38 “오랫동안 ‘누구 엄마’ 하는 식으로만 불리다가 내 이름이 생기니 이상하더라”고 그는 고백한다. 그리고 소설가가 됐다는 것은 그에게 자기 자신의 이름을 비로소 회복시켜주고 한 사람의 사회인으로 거듭나게 한 것 말고도 그의 삶의 내용을 천천히 그러나 깊숙이 바꿔놓고 있었다. 이제 삶은 그냥 사는 것이 아니라 문학의 질료로서 살아져야 했다.
(…)
그걸 일종의 의식화라고 할 수도 있을까요? 뭐든지 챙겨서 보게 되고 무심히 사는 것이 없어지니까, 바로 그것이 사는 맛의 심화이지만 고단한 일이기도 해요. 이건 좀 신기한 일인데 문학은 지독한 곤란에 빠졌을 때 구원의 여지가 되기도 하지요. 곤란을 곧 문학으로 보상받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지요.

p174 포도주가 만들어지려면 뭐가 필요하냐. 우리는 포도, 소주, 설탕, 뭐 이런 대답을 내놓았는데 선생님의 대답은 ‘시간’이었어요. (…) 젊은 작가들, 다들 재주들은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처음부터 ‘나는 글을 쓴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고 그냥 생계를 위해 하루하루를 사는 보통 사람의 생활을 체험하는 일이 필요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체험과 상상력이 행복하게 결합되어 있지 않고 상상력만 과잉되어 있는 작품들은 읽고 나면 좀 허망해요.

본인의 작품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지만, 여러번 거듭 강조되는 그녀의 소설관은 아주 뚜렷하다.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상상력에만 기댄 글은 허망하다고. 그가 쓰고 싶은 글은 그 안에서 나오게 된다고. 그런 생각은 그가 겪으며 지나온 특수한 배경에서 기인한다.

p55 자전적인 이야기 중에서도 남이 단순하게 재미있어할 부분보다는 우리 세대가 그렇잖아요, 내가 원하는 무늬를 짤 수가 없었어요. 하도 바깥바람이 거세서 말이지요. 내 개인적인 것에 역사라는 것이 어떻게 불어와 내 삶을 왜곡시키는지 그런 것에 중점을 두었지 순전히 내 개인적인 것은 울궈먹을 생각이 없어요.

p35 전후의 긴 세월의 일들이 거의 기억에서 지워졌어도 전쟁기는 어제 일처럼 기억에 생생해요. 그러나 오히려 나는 6.25를 소재로 대작은 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체험과 충격의 울타리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갈 수 없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소위 말하는 '소설을 쓴다' 라는 비아냥 거림은 그녀 앞에서 다른 의미로 쓰여야 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박완서의 문학이 진정 가치를 가질 수 있는 이유는 단순히 지나간 현실을 고스란히 잘 반영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p117 “나는 쓰면서 내가 재미있지 않으면 못 쓰는걸.”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듯했다. 나는 왜 문학이 고통의 다른 이름이라고만 여겨왔을까. 낡은 빨랫감 쥐어짜듯 영혼을 사정없이 비틀어 짜려고만 들었을까.
웃을 일이 없어서 내가 나를 웃기려고 쓴 것들이 대부분이다. 나를 위로해준 것들이 독자들에게도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작가의 말, <친절한 복희씨>)

남이야 소설에도 효능이 있다는 걸 의심하건 비웃건 나는 나의 이야기에 옛날 우리 어머니가 당신의 이야기에 거셨던 것 같은 다양한 효능의 꿈을 걸겠다. (<나에게 소설은 무엇인가> 박완서 문학앨범)

p181 그 때 스무 살 스물한 살 무렵에 힘든 시기를 겪고 남다른 경험을 하고 하면서 내가 ‘이걸 잊지 말고 기억해야겠다, 언젠가는 내가 이걸 쓰리라’라는 생각을 많이 했죠. 그런 생각이 그 고통스러운 시절을 견디게 하는 힘과 위로가 되어준 것 같아요. 빨갱이로 몰렸다가 반동으로 몰렸다가 그러면서 부대낄 때 얼마나 이상한 일을 다 격었겠어요. 지금도 이념이라면 지긋지긋해요. 언제나 위로가 됐던 건 ‘언젠가는’이라는 생각이었죠.

p201 내 경험으로 문학은 우리가 가장 고통스러울 때 위안이 되고 힘이 돼주는 것이 아닌가 싶어요. 아주 어려운 지경에 빠졌을 때도 활자만 보면 위안을 얻곤 했죠. 책하고 완전히 격리된 생활을 한 적도 있는데 그땐 너무 고통스러웠어요. 내 문학도 남에게 그런 것이었으면 좋겠어요. 살사는 사람에게도 위안이 필요하지요. 소위 팔자 좋게 잘사는 생활의 답답함이 있잖아요. 고통에만 위안이 필요한 게 아니라 안일해서 무기력해져버린 삶에도 위안이 필요하죠.

 그는 문학이 남을 위해 쓰이기 이전에 자신을 위해 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문학을 비롯한 모든 작가들은 분야를 막론하고 스스로가 자신의 작품의 효용성을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렇지 않고 만들어진 작품들은 필시 어딘가 허무하기 마련이다. 소설을 쓰는 행위부터를 스스로의 안식처로 삼았으니 그가 그토록 다작을 할 수 있었던 원동력도 특수한 경험과 더불어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을까. 어쨌든 그는 본인 스스로도, 다른 사람에게도 문학은 역할은 위안에서 찾았다. 또한 당대의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언급하기도 했는데, 이 역시 근본적으로는 본인이 겪었던 것들을 기록하는 것에서 위안을 찾고자 했던 그의 성향에서 파생된 결과이다.

 두껍지 않고 술술 책장이 넘어가는 책이었지만, 한 사람의 무게가 묵직해서 결코 가볍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그의 문학에 대해서는 직접 접해보고 나서 더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다. 다른 무엇보다 김연수, 신형철, 이병률 등 빼어난 분들의 글로 쓰여진 그에 대한 그리움이 매 페이지 마다 느껴지는 책이라서, 비록 처음이었지만 그 그리움 속에 함께 동승해서 추억하고 싶은 기분이다. 
책의 말미에 이병률 작가가 그에게 물었다. “북쪽을 생각하면 어머니가 많이 생각나세요, 아님 아버지가 많이 생각나세요?” '엄마가 좋아? 아빠가 좋아?' 의 성인 버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유사이래 가장 어려운 질문에 대해 그는 이렇게 답을 했다고 한다. '아버지하고의 인연은 짧아서 자주 생각하고, 어머니하고의 인연은 강력해서 많이 생각한다.' 고. 

문득 이런 어머니를 두었던 호원숙 작가에게 시샘이 난다. 아마 나 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마음의 어머니로 남모르게 모시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거라 생각한다. 처음 알게 된 사람을 그리워 하기는 역시 처음인것 같다.


                                                                                                                                  -클럽 달 4기 첫 번째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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