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하루키의 소설들은 제대로 이해하려고 들면 공부하는 기분이라, 거의 훑는 수준으로 책장을 넘기는데도 불구하고 읽다보면 세상이 일그러지는 느낌이다. 소설은 절대 즐기며 읽어야 한다는 철칙을 세워놨음에도, 정작 내 삶의 방식을 뒤흔들어 놓는 문장들은 자기계발서 따위가 아니라 소설에서 난데없이 튀어나와 카운터를 먹인다. 하루키는 재미는 좀 없어도 크게 한 방씩 먹이는 무언가가 있어서 계속 찾게 된다.
중고책방에 들를때마다 한 권 씩 따로 사모으다보니, 상권 하권 따로 놀게 된..
하루키의 소설은 내용이나 표현 그 자체 보다도, 그 안에 담긴 생각과 세계가 참 재미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특히 가끔씩 나랑 정확하게 같은 생각을 글로 풀어 놓아 놀라기도 한다. 아래에는 소설 본문에서 발췌한 내용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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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백 년 뒤에는 여기 있는 사람들은 모두 예외 없이(나를 포함해서) 지상에서 사라져, 먼지나 재가 되어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중략)..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악착같이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필사적으로 살아가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일까?
-모든 것은 상상력의 문제다. 우리의 책임은 상상력 가운데에서 시작된다. 그 말을 예이츠는 이렇게 쓰고 있다. Indreams begin the responsibilities. 그 말대로다. 거꾸로 말하면, 상상력이 없는 곳에 책임은 발행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헤드폰을 벗어놓자 침묵이 들린다. 침묵이란 귀에 들리는 것이다. 나는 그 이치를 안다.
-다만 내가 그것보다 더 짜증이 나는 것은, 상상력이 결여된 인간들 때문이야. T.S. 앨리엇이 말하는, '공허한 인간들'이지. 상상력이 결여된 부분을, 공허한 부분을, 무감각한 지푸라기로 메운 주제에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바깥을 돌아다니는 인간이지. 그리고 그 무감각함을, 공허한 말을 늘어놓으면서, 타인에게 억지로 강요하려는 인간들이지. ..(중략).. 나는 그런 것을 적당하게 웃어넘길 수가 없어.
-순수한 현재라는 건 미래를 먹어가는, 과거의 붙잡기 어려운 진행이다. 사실은, 모든 지각은 이미 기억이다.
-정확하게 표현하면, 이 돌 자체는 의미가 없네. 상황에 따라 무엇인가가 필요하고, 그게 우연히 이 돌이었던 것이지. 러시아의 작가 안톤 체호프가 멋진 말을 했네. '만일 이야기 속에 권총이 나온다면, 그것은 발사되어야만 한다' 고 말일세...(중략)...필연성이라는 것은 자립적인 개념일세. 그것은 논리나 모럴이나 의미성과는 다르게 구성된 것일세. 어디까지나 역할로서의 기능이 집약된 것이지. 역할로서 필영이 아닌 것은 거기에 존재해서는 안 되지만, 반면 역할로서 필연인 것은 거기에 있어야 하네.
-그때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아도 됐는데, 하고 그는 생각했다. 그냥 살아가면 되었다. 살아 있는 날까지, 나는 어떤 존재라는 사실은 분명했다. 자연히 그렇게 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새 그렇지 않게 되었다. 살아가면서 점점 나는 아무 존재도 아닌 것이 되고 말았다. 그것 참 이상한 얘기로군. 인간이란 살기 위해 태어나는 것 아닌가? 그렇잖아? 그런데도 살아가면 갈수록 나는 알맹이를 잃어간다. 그저 텅 빈 인간이 되어가는 것 같다.게다가 앞으로 살아가면 갈수록 나는 더욱더 텅 비고 무가치한 인간이 되어갈지도 모른다. 그건 잘못된 것이다. 그건 말도 안되는 이야기다. 그런 사고의 흐름을 어디에선가 바꿔놓을 수는 없을까?
-제 인생은 스무 살 때 끝났습니다. 그 뒤의 인생은 끝없이 이어지는 후일담 같은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아무튼 전부 깨끗하게 사라졌다구. 이 세상에 현태가 있는 것이 조금 줄고, 그만큼 무無가 불어난 셈이지.
-인간에게 정말로 중요한 것은, 정말로 무게를 갖는 것은, 어떻게 죽느냐 하는 것이다, 하고 청년은 생각했다. 어떻게 죽느냐에 비한다면, 어떻게 사느냐 같은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람이 어떻게 죽느냐를 결정하는 것은 역시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물 한잔 줄까? 솔직히 말하면 넌 지금 사막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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